※ 박소연 씨가 폐암치료제 ‘잴코리’ 개발회사인 화이자 회장에게 편지를 썼다
안녕하세요? 화이자 제프켄들러 회장님
저는 한국에 사는 박소연이라고 합니다. 올해 30세입니다 미국 나이로 28세입니다. 저는 비소세포폐암 4기 뇌전이 환자입니다.
2005년 여름 대학교 2학년 1학기 학업을 마치고 어학연수를 가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구했고 그 기업에서 건강검진을 원해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엑스레이를 찍자 그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21살(미국 나이 19세)에 폐암 4기라는 진단을 받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임상실험을 시작으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처음 받는 치료여서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밥을 먹지 못해 토하는 날도 부지기수였지요. 철없는 생각에 어떤 날은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엄마에게 강력하게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몰래 도망을 가기도 했답니다.
우여곡절 끝에 첫 번째 항암을 잘 버티어냈습니다. 다행히 뇌에 전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지럼증도 없었고 다른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항암치료가 끝나고 한두달 못가 종양은 이내 다시 커져서 항암치료를 계속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늘 내성이 생길까봐 두려운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구토와 탈모 등 부작용으로 고생이 될 때는 ‘치료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중간 검진을 받고 검사결과가 나오는 날은 지옥이 있다면 이런 세상일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도 모질다는 항암 치료를 잘 견뎌냈습니다.
하지만 제게 시련이 닥쳤습니다. 항암치료 중 임신 사실을 알게 됐는데, 기가 막힌 것은 그 아이를 2주 후에 낳았습니다. 임신을 몰랐다고 할 수 있겠지요. 몸도 성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가정형편상 아이를 낳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막달이 다 된 상태여서 어쩔 수 없이 낳아야 했습니다.
솔직히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제가 처한 환경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아이를 입양 보내려고 했습니다. 가족이라고는 엄마와 저 뿐인 상황어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아이라서 어느 입양기관에서 받아주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만약 아이를 버려야 한다면 고아원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아이를 고아원에 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아이를 버릴 생각에 낳고 며칠 간 보지 않을 정도로 독하게 마음먹었지만, 아이가 가엾고 혼자 있을 생각하니 ‘이렇게 살아 무엇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아이를 제가 키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정말 고맙게도 가족과 친척들 모두 포근하게 저를 감싸주셨습니다. 아이를 키우겠다는 제 마음에 격려를 주셨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꼭 안아주셨습니다.
아이는 지금 저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아이를 위해 더 빨리 건강해져야겠다는 의지가 생겼고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단단해졌습니다. 물론 아이를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엄마마저 ‘간경화’에 ‘길랑바레증후군’을 앓고 계시고, 몇 년 전에는 자궁암으로 자궁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더 힘든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이가 있어서 힘들어도 행복하게 치료 받으며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아이와 행복한 시간도 잠시 또 약에 내성이 왔고 주치의께서 다른 약을 권해주셨는데 혈관에 케모포트 시술까지 하고 또 다시 독한 항암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약이 너무 독하고 부작용이 심해서 중간에 치료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주치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더 이상 쓸 약이 없다고 다른 약을 써도 이제 부작용뿐일 것이고 좋을 게 없으니 이제 포기하라”라고요.
저는 아이 때문에 포기 할 수 없었고 비급여로 이전에 복용했다 내성이 온 약(이레사)을 다시 처방받아 왔습니다. 미혼모 단체에서 아이를 위해 모금된 돈으로 한달치 150만 원 가량 하는 약을 처방 받았습니다 하지만 약은 3개월 만에 내성이 왔고 그동안 잠잠했던 뇌의 종양들도 빨리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항암약을 끊고 뇌에 방사선 치료를 받게 되었어요.
뇌에 방사선을 받고 부종이 심해져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붓고 항암치료도 중단한 상태였기 때문에 몸은 날이 갈수록 만신창이가 되어갔습니다. 방사선 부작용으로 이명이 심해져 왼쪽귀도 거의 안 들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계단 하나를 오르내리기가 힘들었습니다. 저는 집밖에 나가는 것도 싫었습니다. 저희 집이 언덕이어서 너무 숨이 차서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달 한 달 제 몸 상태만 살피시던 주치의께서 “너 처음병원 왔을 때 21살이었지 근데 지금 28살이야 이제 살만큼 살았어. 그러니 이제 병원 오지 않아도 되고 너의 남은 생이 3개월 정도니 잘 마무리하라!”라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 날 제 인생에서 제일 많이 운 것 같아요. 사실 아이가 없었으면 그 정도로 울진 않았을 겁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질 아이가 너무 가엾고 낳기만 하고 제대로 키워주지 못한 엄마라서 미안하고 죄스럽기까지 하더라고요.
정말 선뜻 포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곳 주치의도 “이전 병원에서 해줄 건 다 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유전자 검사를 한 번 더 해보자”라고 제안을 하셔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라는 것이 너무 속상했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다행히 확률이 얼마 되지 않는 잴코리 항암제를 복용하는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크게 기대를 안했는데 약을 먹은지 3일 만에 기침 가래가 멎었고 숨도 덜 차고 활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살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겼습니다. 내 아이에게 제대로 엄마가 되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벅찼습니다.
하지만 약이 한 알에 16만 7500원... 하루에 두 알을 복용해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한 달 약 값이 천만 원이나 됩니다. 기초생활수급자에 한 부모 가정인 제게는 많은 액수 이상이 약값입니다.
아이를 위해 살긴 살아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미혼모 단체에서 아이를 위해 모금한 돈도 약값으로 써 버렸습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모은 성금도 모두 잴코리에 다 써 버렸습니다. 한국에서는 한 가정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의료비가 생기면 도와주는 ‘재난적 의료비’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저는 이 혜택의 최대치를 받았지만 이 또한 금방 다 써버렸습니다.
주변에 도움이라는 도움을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잴코리 약값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라고요. 이제 겨우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는데, 돈 때문에 그 희망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희망을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더 힘들지 않았을 겁니다. 그까지 돈 때문에 내 청춘을 끝내야 하는 것도 억울하고 우리 아이에게 놀아줄 수 없는 것도 분합니다.
약값 때문에 아이가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사주지 못했습니다. 그 엄마의 마음을 회장님은 아실런지요?
한국 화이자와 건강보험공단에, 그리고 청와대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편지도 써보고 전화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다 한결 같더군요. ‘기다려 달라! 비용효과성 문제로 안 된다.’라고요.
절망한 저는 치료중간에 일부러 이 약을 안 먹겠다고 버티다가 통증이 심해져 응급실에 간 적도 있습니다. 비용문제로 처방을 못 받아서 치료를 못 받는다는 사실에 서러워서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제가 회장님께 편지를 쓰는 이유는 잴코리가 그저 그런 항암제가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잴코리 이후 제 삶의 질이 높아졌습니다. 몸이 힘들어 아이와 함께 놀이터를 가주는 것도 어려웠는데, 이제는 가끔씩 아이와 놀아주기도 합니다. 엄마를 옆에 두고서 뛰어노는 제 아이의 얼굴이 너무 밝습니다. 아이가 너무 좋아서 팔짝팔짝 뛰는 모습을 보면 저도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집니다.
회장님, 제게는 소원이 있습니다. 좀 더 건강해져서 우리 아이와 함께 놀이공원 가는 것입니다. 도시락을 싸고 소풍을 가서 함께 놀이기구를 타며 놀아보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아빠도 없는 제 아이가 외롭지 않게 클 수 있도록 20살이 될 때까지 만이라도 옆에 있어주고 싶은 것이 더 큰 소원이라면 소원입니다.
회장님 제가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2014년 9월 3일
한국에서 박민하 엄마 박소연 올림